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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柳誠「日韓越の医学と中国医書」『日本医史学雑誌』56巻2号151-159頁、2010年
(第111回日本医史学会総会・学術大会、会長講演、水戸市・茨城大学人文学部講義棟、2010年6月12日)

〔한국어 번역판〕일본•한국•베트남의 의학과 중국 의서 →관련 도판

마야나기 마코토(眞柳 誠)
한국어 번역 : 조정은

 

  체계를 갖춘 전통의학의 특징으로, 주로 서적을 통해 지식이 획득•보급•전승되어 그 체계와 전통도 형성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서적은 쉽게 국경을 넘어 유통되고 복제된다. 그 때문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자문화권의 의서는 대략 1500年 이상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近世까지의 중국•일본•한국•베트남에서는 같은 계통의 의료가 행해졌고, 지금도 각국의 전통의료로써 존속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학을 하나의 큰 나무에서 여러 가지가 갈라져 나온 것이라 비유하는 사람도 있으나, 광대한 중국에서 생겨난 의학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정확하게는 중국의학의 숲에서 자란 다양한 수목의 열매가 주변으로 옮겨져, 각 토양에 적응한 종만이 선택적으로 발아하였거나 혹은 재래종과 융합되어 다른 대지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다른 숲을 형성하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각국의 역대 고의서야말로, 각 지역의 고유한 열매라 할 수 있다.

   예전에도 일본과 중국,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중국과 베트남의 의학을 비교하는 연구는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상대론때문에 객관성이 확보되지 못하여 자국 중심의 우열론으로 빠지기 쉽다. 더욱이 동아시아 의학의 비교연구 자체가 거의 없다. 이러한 극소수의 연구 중 대다수가 대표적인 저술이나 학설이라는 특정한 열매나 미각의 “定性”분석으로 서로간의 특징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필자는 한자문화권의 고의서라는 전체 열매를 공통의 척도로 삼아, 각국의 의학사를 “定量的”으로 비교연구하고자 한다. 이 4개국간의 비교연구를 통해 자국중심주의를 배제하고, 객관적인 데이타의 輕重을 기초로 공통점과 史的 배경을 귀납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각국의 전통과 경향을 서로간에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1. 연구대상

  본 연구에서는 각국에 현존하는 4개국의 고의서 서지 목록 데이터 및 장서 목록 등의 著錄을 대상으로 하였다. 중국 서적은 淸末 1910年까지, 일본 서적은 막부 말기인 1867年까지, 한국 서적은 일본 통치전의 1909年, 베트남 서적은 프랑스 통치 전인 1886年까지 저술되거나 필사·간행된 문헌으로 復刻書가 있으면 그것도 이용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蘭學과 같은 유럽 계통의 의서도 포함된다.

   또한 필자는 타이페이 고궁 박물원[1], 베트남 국가도서관[2] 및 조선왕조의 장서가 보관된 서울대학교 규장각[3]등에 소장된 고의서에 대해 조사하고 서지 데이터의 보고를 마쳤다. 현재는 타이페이 국가도서관의 전체 조사 데이터를 보고하는 중[4]이며, 한국 최대의 장서 기관인 국립중앙도서관과 베트남 최대의 고적 소장 연구 기관인 漢喃연구소도 조사를 거의 마친 상태로, 보고를 준비 중이다. 원본을 조사하면서 얻은 서지 데이터는 구미 소재 서적이 약 150部, 베트남 456部, 한국 907部, 대만은 고궁의 『四庫全書』를 제외하고 809 部에 달한다. “部”라는 것은 한 세트로 존재하는 서적의 수이다.

  일본 소재 서적은 일본 의서와 중국 의서 약 1600 部의 원본 조사를 마쳤다. 이를 포함하여 일본 서적의 醫藥·博物書 15070 種에 대해서는 國文學硏究資料館가『國書總目錄』•『古典籍總合目錄』등에서 수집한 서지 데이터베이스의 이용허가를 받아 연표화하여 연재 보고를 하고 있다[5]. 조사에 제한이 많은 중국 대륙 소재 서적은 225部까지는 원본 조사를 마치고 中國中醫科學院이 데이터베이스화 한『中國中醫古籍總目』[6]에서 중국 의서 12637 種에 대해 서지 데이터를 수집하였다. “種”은 책의 版本이나 寫本의 차이를 무시하고 1 種으로 계산한 책 수이다.

   이상으로 각 장서의 중복을 제외하면 한자문화권 4개국의 고의서는 약 28000종을 조사하였으며 이는 현존하는 서적의 90% 전후를 망라하고 있다고 추정된다[7]. 또한 원본의 소재를 알 수 없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책에 대해서도 수집한 데이터와 관련 사료의 기재를 참고하여 추정이 가능한 경우에는 연구에 사용하였다.

2. 연구방법

  대상으로 삼은 고의서 서지 데이터 약 28000종을 먼저 제1단계로 다음과 같이 定量解析하고, 定性的으로 고찰한다. ①각국의 의서가 타국에서 복각된 회수와 복각 시기의 집계와 해석 ②자국화를 체계화 한 각국의 의서가 인용한 타국 의서의 집계와 해석. 이 데이터를 통합하여, 다음과 같은 부분을 고찰한다. ③ 각국의 체계 형성에 타국의 의서가 행한 역할과 공통점 ④각국의 전통과 체계의 형성에 관여한 역사, 지리적 요인. 

   또한 다른 시점에서의 데이터의 해석도 준비 중이나, 이번 발표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하에는 고의서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의 저자•서명•권수•본국에서의 初版年(혹은 저술된 연도)을 기록하고 그 이후는 기본적으로 서명만 기록하였다.

3. 집계 결과

3-1 각국의 의서가 타국에서 복각된 횟수·시기 및 해석

3-1-1 중국
  1910年 이전의 중국에서 복각된 타국 의서로는 다음의 27종이 있다. 中國版 베트남 서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말미의 괄호 안은 복각된 연도)

① 中國版 한국 서적: 3종•24회
  1)金循義 외『鍼灸擇日編集』1卷(1447年 저술):4版(1890,1891,1892,1910.1890은 日本版木에 의한 重印).2)許浚 『東醫寶鑑』25卷(1613 年 初版):18版(1763,1763,1766,1796,1796,1797,1821,1831,1831,1847,1885,1885,1889,1890,1908,간행 연도 미상의 明版1種•淸版2種.1890과1908은 日本版木에 의한 重印).3)康命吉『濟衆新編』8卷(1799年 初版):2版(1817,1851).

   이상으로, 한국 의서의 中國版은 청조 후기 19세기 이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출된 日本刻 한국 서적의 版木이 관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東醫寶鑑』의 복각 횟수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 中國版 일본 서적:24종•33회
  1)多紀元簡『觀聚方要補』10卷(1857再版本):3版(간행 연도 미상의 淸版3종과 함께 에도 시대 1857年의 版木에 의한 重印).2)多紀元簡『脈學輯要』3卷(1795年 初版)•3)『救急選方』2卷(1801年 初版)•4)『醫賸』3卷附1卷(1809年 初版)•5)『金匱玉函要略輯義』6卷(1811年 初版)•6)『傷寒論輯義』7卷(1822年 初版)•7)『素問識』8卷(1837年 初版),8)多紀元胤『難經疏證』2卷(1822年 初版),9)多紀元堅『傷寒廣要』12卷(1827年 初版)•10)『傷寒論述義』5卷(1838年 初版)•11)『藥治通義』12卷(1839年 初版)•12)『金匱玉函要略述義』3卷(1854年 初版),13)多紀雅忠『醫略抄』1卷(1795年 初版),14)小坂元祐『經穴纂要』5卷(1810年 저술):1版(1884.위의 13書의 日本版木을 이용하여『聿修堂醫學叢書』으로 合印.淸末까지 다수 復印되었다.).15)佐藤正昭『古方通覽』1卷(1799年 저술):2版(1885,간행연도 미상의 淸版 1種).16)本庄俊篤『眼科錦囊正編』4卷•『眼科錦囊續編』2卷(1831·1837年 初版):2版(1885,간행 연도 미상의 淸版1種).17)橘尙賢『黴瘡證治秘鑑』2卷(1776年 初版):3版(1885,1895,간행 연도 미상의 淸版1種).18)岸田吟香『花柳辨證要論』1卷:1版(1888,岸田吟香의 上海樂善堂에서 출판).19)多紀元堅(松井操漢譯)『診病奇侅』2卷(1843 年 저술),20)森雲統 『五雲子腹診法』1卷:1版(1888,王仁乾이 일본에서 출판).21)石神亨(沙曾詒漢譯)『肺病問答』1卷(저술·간행 연도 미상):2版(1894,1903).22)源養德『脚氣類方』1卷(1763年 初版):1版(1899).『脈學輯要』:2版(1901,1904).23)吉益南涯『輯光傷寒論(중국명:刪定傷寒論)』2卷(1822年 初版):1版(1910).24)丁福保이 일본의 生藥學書로부터 중국어로 번역한『化學實驗新本草』1冊:1版(1910).

  이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중국판으로, 대부분이 일본에서 유출된 日本版木에 의한 重印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서양의학 일원화 정책으로 전통 의학서의 출판이 무의미해졌지만, 이러한 中國版에는 한문의 훈독을 위해 찍은 부호가 지워지지 않고 다수 남아있다. 또한 일부에는 일본 문서에서 새롭게 중국어로 번역된 中國版도 존재하여, 메이지 이후의 일본에 주목하게 한다.

3-1-2 일본
  1867年 이전의 일본에서 복각된 타국 의서는 중국 의서가 많고, 그 다음이 한국의서이다. 베트남 의서는 보이지 않는다.

③日本版 중국 의서:약 315종•683회
  에도 시대 이전에 출판된 중국 의서로는 다음의 세 책이 있다. 효시는 明의 熊宗立『〔新編名方類證〕醫書大全』24卷(底本은 熊氏種德堂1467年版)의 복각본(1528)이다. 두 번째도 熊宗立의 책으로,『俗解八十一難經』7卷(底本은 鰲峰熊氏中和堂 1472刊本)의 복각본(1536)이다. 그 외에 宋의 施發『察病指南』3卷이 무로마치 시대 중엽 15세기경에 복각되었고, 이 책과 함께『俗解八十一難經』은 에도 시대에도 복각되었다.

   에도 시대는 상업 출판이 발달하여, 약 320書의 중국 의서가 복각되었으나, 刊印年 이 알려지지 않은 책 및 판본의 相違을 제외하면 314종이 된다[8].  314종의 복각 횟수는 총 680회로, 세목은 醫方411,本草53,傷寒70,金匱16,內經60,鍼灸39,痘疹31회이다. 이를 통해 임상 의학서의 醫方•鍼灸•痘疹이 주로 복각되었다는 점과, 本草•傷寒•金匱•內經과 같은 기초 의학서도 일정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日本刻 횟수를 10年마다 집계하면, 에도 시대 전기 1651年~1660年을 정점으로 중국 의서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에도 시대 후기 1791年~1800年을 정점으로 다소 유행하였다. 전기의 대유행은 임상 의학서가 중심이 되었고, 후기의 유행은 기초 의학서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복각 횟수가 많은 책의 저술 연대·권수·복각 시기를 분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복각 횟수가 많고, 잘 팔린 책은 8권 이내의 간편한 책(글자 수로 따지면 『傷寒論』10권은 실제로는 6권 정도이다)이었다. 이러한 책들은 중국의 전 시대를 아우르며, 대체적으로 에도 시대 전기에 유행하였으나, 『傷寒論』•『金匱要略』의 경우에는 중기부터 후기에 유행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④日本版 한국 서적:7종•12회
  1)權仲和 외『新編集成牛醫方馬醫方』2 卷(1399年 初版):1版(에도 시대 전기.底本은 1580版).2)李昌庭『壽養叢書』4卷(1617年 저술):1版(1669).3)崔致雲『新註無寃錄』 2卷(1440年 初版):1版(에도 시대 전기~중기).4)許浚 『東醫寶鑑』25卷(1613年 初版):3版(1724,1730,1799.에도 막부의 명에 의해 교정•복간됨).5)許任『鍼灸經驗方』3卷(1644年 初版,1卷本):2版(1725,1778).6)崔致雲 『無寃錄述』2卷(1440年 初版 『新註無寃錄』下卷의 발췌 번역):3版(1768,1799,1854).7)金禮蒙 외『醫方類聚』266卷(1477年 初版):1版(1861.에도 막부의 醫官에 의한 교정•복간).

   이러한 한국 서적의 日本版은 중국 서적 보다 적지만, 에도 시기 전체에 걸쳐 출판되고 있다. 분야도 獸醫•養生•鍼灸가 각 1종으로 총 4회, 法醫學書 및 의학 전 분야의 기초부터 임상까지를 기록한 의학 전서가 각 2종으로 총 8회 출판되는 등 각 분야가 거의 다 망라되었다. 또한 25권이나 266권이나 되는 출판물의 경우에는 에도 막부가 관여하고 있어,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1-3 한국
⑤韓國版 한국 서적:93종
  1909年 이전 한국에서 복각된 타국 의서는 중국 서적뿐으로, 三木榮[9]은 92종을 들고 있다. 이는 史書•目錄에 기록된 것만을 든 것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책도 포함되어 있으며, 빠진 책이 3종,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오인이라고 판단되는 책이 2종 있다. 따라서 三木榮가 실제로 조사한 것은 93종이다.

   한국의 중국 의서 간행은 중국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빨라, 고려시대인 1059年에 시작되었다. 조선 전기가 전성기로, 다수의 의서가 활자 출판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중앙 또는 지방정부의 간행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壬辰•丁酉倭亂)으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진 후에는 출판도 감소하였으나 19세기 전후부터는 상업 출판도 보급되어 점차 증가하였다. 이러한 韓國版 중국 서적 중 많은 수가 1~3회 복각된 것으로, 三木의 조사에 필자의 조사 결과도 포함하여 5번 이상 복각된 책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1)王惟一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5卷(1026年 初版):9版(1431,1543,1553,1578,1585年 이전,1619年頃,1655,1778年頃,19세기).2)李希憲 監校『〔新刊補註釋文〕黃帝內經素問』12卷(1068年 初版):6版(15세기 후반,16세기 후반 2종,1585年 이전,1615,18세기 후반).3)虞搏 『〔新編〕醫學正傳』8卷(1531年 初版):6版(1531~1544年간,1564年 이전,1585年 이전,1675年 이전,18세기 후반,1819).4)李梴『〔編註〕醫學入門』首1卷•7卷(1575序刊):6版(1613年頃,17세기 후반,1675年 이전,1818,1820,1909).5)李東垣 외 『東垣十書』(1399~1424年 初版)全10書:5版(1488,16세기 전반,1540年頃,16세기 후반,1765).

   이상의 5종은 1909年 간행된 『醫學入門』외에는 모두 정부 간행물이라 생각되며, 국가가 중시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복각 횟수가 가장 많은 것과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기초의학서로, 北宋 정부의 편찬물이며, 그 다음 책들은 醫學全書 또는 총서로 明代 민간에서 편찬·간행한 책이라는 특징이 주목된다.

3-1-4 베트남
⑥ 베트남版 중국 서적:최저15종•17회
  1886年 이전의 베트남에서 복각된 타국 의서는,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寫本에서 추정한 것까지 포함하면 다음의 중국 의서 15책이 필자의 하노이 조사에서 확인되었으나, 일본 서적이나 한국 서적의 복각은 찾지 못했다.

   1)『醫學正傳』:최저1版(18세기?). 2)薛己『外科樞要』4卷(1571年 初版):최저1版(1807). 3)『〔編註〕醫學入門』:최저2版(1859年 이전,1859).4)龔廷賢『萬病回春』8卷(1588年 初版):최저1版(19世紀).5)龔廷賢『〔新刊〕雲林神彀』4卷(1591年 初版): 최저 1版(19세기).6)龔廷賢『〔醫林狀元〕壽世保元』10卷(1615年 初版):최저1版(19世紀).7)聶尙恒『活幼心法大全』9卷(1616年 初版): 최저 1版(19세기).8)翟良『〔醫海大成〕痘科纂要』1卷(1657版『翟氏醫書五種彙刻』本): 최저 1版(1844).9)費啓泰『救偏瑣言』10卷(1659年 저술): 최저 1版(1881).10)萬全『萬氏婦人科』1卷(『萬氏女科』3卷〔1712年 初版〕의 발췌 번역본): 최저 1版(19세기 후반).11)吳又可『瘟疫論』3卷(1715版『醒醫六書』本): 최저 2版(1848,1876).12)唐千頃『大生要旨』5卷(1762年 初版): 최저 1版(1870).13)邵志琳『延齡藥石』1卷(1774序刊『呂祖全書』卷25): 최저 1版(1870).14)邱浩川•王惇甫增補『牛痘新書〔濟世〕』(1865年 初版): 최저 1版(1874).15)容山德軒『〔新刊〕普濟應驗良方』8卷(1799序刊):최저 1版(1875).

   이상의 베트남版 15종은, 日本版 약315종, 韓國版 93종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고온 다습한 기온과 전란으로 인해 책이 전해지기 매우 어려웠다. 또한 각각의 중국 서적이 이른 시기에 저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각이 전부19세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이른 시기의 베트남版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때문에 복각 횟수도 “최저 몇 版”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明代와 淸代의 책뿐으로, 復刻年과 비슷한 淸代 후기의 책이 14)의 1종밖에 없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체의 내용은 임상의 各科 및 醫學全書를 아우르나, 小兒科•産婦人科•養生(노인을 주 대상으로 함)과 관련된 책이 많은 점, 明代의 醫學全書 특히 龔廷賢의 저술이 많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2 자국화를 체계화 한 각국의 의서가 인용하고 있는 타국 의서 및 그 해석.

3-2-1 일본의『啓迪集』
  일본 의서의 독자화는 丹波康賴의『醫心方』30卷(984年 저술)부터 현저하게 나타나나, 이를 현재의 임상치료에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에도 시대 초기에 형성된 後世方派와 에도 시대 중기에 형성된 古方派 등이 昭和 이후에 융합된 임상치료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後世方 의학을 제창한 曲直瀨道三(1507~1594)은 일본 의학 중흥의 시조라 불린다. 스스로 지은 성 “曲直瀨”은 “동쪽의 섬나라 流派”라는 의미라고 추정된다. 즉 道三은 중국과는 다른 일본의 풍토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10].

   道三의 대표작인『啓迪集』8卷(1574年 저술)은 의학의 全科에 걸치며, 이후의 後世方派가 나아갈 방향을 정한 책이라 평가 받는다. 기본적으로 道三의 문장은 없으나, 중국 의서의 문장을 발췌하여 자신의 견해에 따라 취사 선택하거나 가공한 것을 인용하여 책을 편찬하였다. 이 형식을 이용하여 道三은 독자성을 형성하였으며『醫心方』에서도 같은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啓迪集』의 기술에 다수 인용되고 있는 “科疏形式”은, 劉開 『脈訣理玄秘要』(1241年 저술)•王好古 『此事難知』(1248?年 저술)와 道三 이전의 일본 의서에도 보인다.

   『啓迪集』에 인용된 중국 의서는 王鐵策•小曾戶洋[11]의 검토에 따르면 46종으로, 각각의 인용횟수도 조사되어 있다. 즉, 『醫學正傳』의 인용이 가장 많아 462회이며 그 다음으로 劉純『玉機微義』50卷(1396序刊)404회,王璽『醫林(類證)集要』20卷(1482年 初版)271회,楊珣『丹溪心法類聚』2卷(1507年 初版)198회,王永輔『〔簡效〕惠濟方』8卷(1530年頃 저술)169회의 순이다. 이 중 상위 5書의 인용이 전체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道三이『啓迪集』을 편찬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모두 明代의 편찬물이며, 『丹溪心法類聚』을 제외한 4書는 『啓迪集』과 같은 醫學全書라는 공통점도 있다.

3-2-2 한국의『東醫寶鑑』
  한국 의학의 독자화는 조선 초기1433年 敕撰 醫學全書『郷藥集成方』 85卷이 편찬되면서 명확해졌으며, 이는 책 이름에 포함된 “郷藥”이라는 단어에서도 잘 나타난다. 1477年 간행된 敕撰 『醫方類聚』266卷 은, 唐代~明初의 의서 153종 이상을 인용한 일본•중국•한국•베트남을 통틀어 최대의 醫學全書이나, 너무 방대하여 조선에서 한 번밖에 간행되지 못했다.

   독자화를 확립시키고 높은 수준으로 현재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許浚(1539~1615)의 敕撰 醫學全書『東醫寶鑑』이다. 책의 集例(凡例)에 수록된 許浚의 “我國之醫亦可謂之東醫也”라는 문장에서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자국 의학에 대한 의식이 잘 나타나있다. 1909年 이전까지 총 6번 출판[12]되고 있으며, 동일한 版木에 의한 重印까지 합하면 상당한 횟수에 이를 것이다. 중국에서는 18회, 일본에서는 3회 復刻되었는데, 이는 重印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수가 많다.

   許浚은『東醫寶鑑』의 序文•集例에 계속해서 “歷代醫方”으로 편찬에 인용한 漢代부터 明代 16세기까지의 중국 의서 83종 및 자국의 『醫方類聚』•『郷藥集成方』•『醫林撮要』을 시대순으로 저자명도 열거하였다. 기본적으로 인용문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키워드를 크게 쓰고 그 밑에 설명을 작게 쓴『醫學入門』의 형식을 따르며, 인용문의 출전이 하나하나 상세하게 약칭으로 注記되어 있다. 金重權 [13]의 검토에 따르면 인용은 “本草”가 가장 많고, 조선시대 1577年에 復刻된 『(政和證類)本草』을 중심으로 인용하였다고 생각되며, 그 외에도 宋代~明代의 여러 本草가 혼재되어 있다. 상위 10書의 인용횟수는 다음과 같다.

   “本草” 3597회,『(醫學)入門』 2781회,程充 『丹心(丹溪心法)』5卷•附(1481年 初版)1275회,危亦林 『(世醫)得效』20卷(1337년 저술) 1084회,樓英『(醫學)綱目』40卷(1565年 初版) 926 회,龔廷賢『(古今)醫鑑』8卷(1577年 初版) 726회,『(醫學)正傳』553 회,『(萬病)回春』 525회,『東垣(十書?)』 525회,『(黃帝)內經(素問)』489회,『銅人(腧穴鍼灸圖經)』468회.

  이를 통해 조선 정부가 5회 이상 復刻한 중국 의서 5종 전체가 『東醫寶鑑』의 인용횟수 상위 10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千金方』과 같은 唐의 醫學全書의 인용은 거의 없고, 元•明代의 醫方書 및 全書•叢書의 인용이 많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인용횟수로부터 알 수 있듯이, 『醫學入門』>『丹溪心法』>『世醫得效方』>『醫學綱目』>『古今醫鑑』>『醫學正傳』>『萬病回春』『東垣十書』순으로 중시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3-2-3 베트남의『醫宗心領』
  베트남의 醫書名에는 南藥이나 國譯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 빠른 예로는 14세기 후반의 慧靖『南藥國語賦』등을 들 수 있으며, 베트남에서 나는 南藥으로 치료할 경우의 효과를 기록하였다. 전술한 베트남版 중국 서적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서적도 18세기보다 더 오래된 원본이 현존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또한 근세 이후의 중국을 대표하는 출판문화는 베트남에서는 일부에 불과하며, 많은 서적이 필사본 혹은 발췌본 형식으로 작성·전승되었다. 그 때문에 베트남 의학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은 많지 않다. 

   그 대표적인 서적으로 黎有卓(호는 海上懶翁,1720~1791)의 醫學全書『〔海上懶翁〕醫宗心領』66卷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베트남화된 醫藥學이 집대성되어 있다. 懶翁은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醫人이라 불린다. 이 책은 1770年~1780年에 걸쳐 저술되었고, 1880年~1885年에 걸쳐 간행되었다. 전체는 개별의 책을 집성한 개인 총서의 형식으로 편찬되었는데, 張介賓 『景岳全書』64卷(1710年 初版)과 비슷하다. 내용은 주로 중국 서적의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懶翁 자신의 문장도 적지 않다. 인용 문헌은 각 권의 凡例에 저자명을 포함하여 간략히 기록되어 있으며, 문장 안에도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王太僕(注)『素問』,仲景(『傷寒•金匱』),巢氏(『病源』),東垣•丹溪(『東垣十書』),『簡易(方)』,『醫學入門』,『古今醫鑑』,『壽世保元』,『薛氏醫案』,『醫貫』,『錦囊(秘錄)』,『景岳全書』,『(證治)準繩』,『(李)士材(醫書)』,『頤生(微論)』,『救偏瑣言』,『萬氏家藏』,『婦人良方』,『濟陰綱目』,『産寶』,『保産(機要)』,錢仲陽(『小兒藥證直訣』),『保赤全書』,『痘疹心法』,『痘疹金鏡錄』,『雷公炮炙論』,『本草綱目』
『本草綱目』

  위의 서적들은 漢代에서 淸代 중기까지의 책으로, 거의 전 분야에 걸쳐있으나, 産婦人科·小兒科書 및 本草書가 많다. 또 本草을 제외한 기초 의학서가 적고, 明代 중기부터 淸代 전기의 醫學全書가 많다. 전체적으로는『醫學入門』의 인용이 눈에 띄며, 卷14“外感通治集”에는『醫學入門』을 5年간 공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다음으로 자주 인용된 책은『景岳全書』이다. 문장 중에는 “經驗” “南藥”등 자국을 강조하는 부분이 보이며, 베트남에는 傷寒病이 없기 때문에 麻黃•桂枝을 이용한 發汗治療는 불가능하다고 기록한 부분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4 고찰

4-1 각국의 체계형성에 보이는 공통점

  중국에서는 한국 의서·일본 의서가 復刻되어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淸朝 후기 이후의 일로, 중국 의서가 총12637건이라는 점에서 보면, 淸末까지 중국 의학 체계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국 서적『東醫寶鑑』의 復刻 횟수는 본국보다 더 많았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메이지 유신 이후 版木이나 原本이 중국에 수출•소개된 일본 서적의 경우는 막부 醫官이 쓴 고도의 연구서가 많아 현대 中醫學의 형성에 조금이나마 기여하였다[14][15].

   일본에서는 에도 전기를 중심으로 중국 의서의 출판이 유행하여, 약 315종이 683회나 復刻되었고, 당연히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주로 임상 의서였으나, 에도 후기에는 기초 의학서도 다소 유행하였다. 한편, 일본 의학의 방향을 잡았다고 평가되는『啓迪集』에는 明代의『醫學正傳』•『玉機微義』•『醫林集要』•『丹溪心法類聚』로의 경향이 명확이 보이며, 에도 시기에는 明의 醫學全書인『萬病回春』이 20版[16]이나 復刻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중국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빠르게 중국 서적이 출판되어, 조선 말기까지 93종의 復刻이 확인되었다. 이는 현존하는 한국 의서가 약 300종임을 감안할 때 꽤 많은 수로, 중국 의서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5회 이상 復刻된 중국 서적은 정부 간행물이 대부분으로, 국가 정책의 일환이었다. 敕撰書로 한국 의학 체계를 구축한『東醫寶鑑』에는 醫方書인『醫學入門』•『丹溪心法』•『世醫得效』•『醫學綱目』•『古今醫鑑』•『醫學正傳』•『萬病回春』의 인용이 많으며, 특히『醫學入門』가 중시되었다. 이는『醫學入門』가 6회나 復刻되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龔廷賢의『古今醫鑑』·『萬病回春』의 인용이 많다는 점도 주목된다.

   베트남에서는 중국 서적의 復刻이 15종까지 확인 혹은 추정되나,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임상 의학서가 많으나, 『醫學入門』이외에 龔廷賢의『萬病回春』·『雲林神彀』•『壽世保元』이 함께 復刻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더욱이 베트남 의학을 체계화한『醫宗心領』에서도『醫學入門』을 필두로 龔廷賢의『古今醫鑑』•『壽世保元』이 인용되어 있다.

明代 의서의 각국 版數(베트남版은 최저 수)[17]

書名(中國初版年)

明版

日本版

韓國版

베트남版

玉機微義(1396)

8

5

1

0

東垣十書(1399~1424)

7

5

5

0

醫林集要(1482)

4

2

1

0

醫學正傳(1531)

5

11

6

1

醫學入門(1575)

5

8

6

2

萬病回春(1588)

7

20

4

1

雲林神彀(1591)

4

5

0

1

壽世保元(1615)

1

1

0

1

  이러한 일본•한국•베트남의 자국화에 보이는 공통된 특징은, 각 각 체계화시킨 서적이 曲直瀨道三•許浚•黎有卓이라는 한 명의 醫家에 의한 醫學全書라는 점이다. 여기에 인용된 서적도 각각 明代의 한 醫家에 의한 醫學全書이다. 또한 자국을 강조하려는 의식도 3書에 공통적으로 보인다. 특히『醫學入門』는 한국과 베트남의 2書에서 첫 번째, 『醫學正傳』는 일본에서 첫 번째이자 한국에서는 6번째로 자주 인용되었으므로 이 두 책은 각국 의서의 자국화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16세기의 『啓迪集』에서는 시기가 맞지 않아 이용되지 않았지만, 16세기말부터17세기 초의 龔廷賢『萬病回春』•『雲林神彀』•『壽世保元』도 인용 및 復刻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明代 의서의 각국 版數를 정리한 왼쪽 표를 통해, 이러한 의서가 본국 明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일본·한국에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한국·베트남의 의학은 매우 비슷한 의식을 지니고 자국화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4-2 영향을 미친 중국 의서와 시대•지리적 환경

   그렇다면 일본·한국·베트남의 체계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한 중국 의서, 즉 한 사람의 明代 醫家가 저술한 醫學全書는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이에 관해 3국에서 공통으로 인용하거나 復刻한 虞搏『醫學正傳』•李梴『醫學入門』•龔廷賢『萬病回春』에 주목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醫學正傳』8卷의 編者인 虞搏은 長江이남의 중국 남방, 浙江 義烏 출신으로, 科擧를 보던 도중에 의사로 전향하였다. 1515年의 自序에 따르면, 동향의 朱丹溪(1281~1358)를 존경하여, 先人의 精華를 책에 정리하였다고 한다. 『醫學正傳』는 1531年에 초판이 나왔는데, 현존하는 明의 第3~5版은 書商에서 간행한 것이다. 『醫學入門』8卷의 編者인 李梴도 중국 남부,江西 南豐 출신으로, 虞搏와 마찬가지로 科擧를 보던 도중에 의사로 전향하였다. 『醫學正傳』는 키워드는 주로 歌賦로 크게 쓰고, 그 밑에 대량의 설명을 작게 기록하는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集例에는 『玉機微義』이나『醫學正傳』를 주로 참조했고 歌賦는 대부분이 劉純『醫經小學』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玉機微義』와『醫經小學』의 編者는 劉純으로, 그의 부친 劉叔淵은 朱丹溪의 제자였다. 이 책의 明版은 초기 단계부터 상업 출판이었다고 판단된다.

   『萬病回春』8卷의 編者인 龔廷賢도 중국 남방 지역인 江西 金溪 출신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의사로 전향하였다. 金元諸家의 학설을 통합하고 名醫로써 이름을 날려 太醫院의 醫官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萬病回春』외에 『古今醫鑑』•『雲林神彀』•『壽世保元』등 많은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들은 인척 관계에 있는 金陵(南京)의 書商에서 출판되었다. 龔廷賢의 책은 특효 처방을 집대성하고 이곳 저곳에 四言•五言•七言의 歌訣로 키워드를 기록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醫學正傳』•『醫學入門』•『萬病回春』의 編者는 세 명 모두 중국 南方人으로, 進士에서 의사로 전향하였으며, 그 중 두 명은 朱丹溪派였다. 3書는 모두 8卷本의 醫學全書로, 각 분야의 요점과 중요 처방을 歌賦를 사용해서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和劑局方』과 같은 국가 편찬물이 아닌, 한 사람의 재능으로 기초부터 임상까지 全科에 이르는 의학 체계를 구축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各書의 개성 있는 의학체계의 배경에는 상업 출판되어 “잘 팔리는 책”을 전제로 편찬하였다는 요인이 작용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전 분야를 망라하였음에도 8卷으로 요점 정리한 이유는 30卷이나 40卷이 되면 비싸서 “잘 팔리지 않는 책”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明朝는 1421年에 수도를 北京으로 이전하여, 그 전까지 수도였던 南京은 副都가 되었다. 그럼에도 南宋부터 계속되어 온 江南의 학술이나 출판문화의 優位性은 明朝 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정치의 北人에 대한 南人의 문화경제라는 자립 의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18]. 의학에서도 南人인 王綸은 『明醫雜著』(1502年 初版)에서 李東垣을 北醫,朱丹溪을 南醫라 칭하였고, 중국의 南北의 治法이 서로 다름을 분명히 밝혔다[19]. 위의 3書뿐만이 아니라 明代에는 의서 편찬과 출판의 대다수가 중국 남방에서 이루어졌으며, 明代 중후기에는 압도적으로 江南 지방이 많다. 『醫宗心領』이『醫學入門』다음으로 영향을 받은 明末의 『景岳全書』의 저자 張景岳도 浙江 會稽 출신으로 南人이다.

   『醫學正傳』•『醫學入門』•『萬病回春』3書는 유학자에서 의사로 전향한 중국 남방인이 개성적으로 체계를 구축한 의서였다. 또한 일본•한국•베트남의 의학 형성에 명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許浚은 王綸의 말을 인용하여, 자국의 의학을 東醫라 칭해『東醫寶鑑』이라 명명하였다. 즉 일본·한국·베트남의 醫家는 明代의 중국 남방인이 편찬한 醫學全書의 체계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北醫學에 대한 南醫學의 독자성이라는 주장까지 간파하여, 이를 중국과는 다른 자국 고유의 체계를 형성하려는 동기로 삼았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독창적인 체계의 창출은, 걸출한 한 사람의 개성으로만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동서남북의 의료가 서로 다르다는 점은 漢代의『素問』에서부터 이미 인식되어 왔다. 각국의 독자화도 일본은 10세기의『醫心方』에서,베트남은14세기의『南藥國語賦』에서,한국은 15세기『郷藥集成方』에서 시작되었다. 왜 『啓迪集』『東醫寶鑑』『醫宗心領』의 16~18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까지 이어지는 각국의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체계가 형성되었던 것일까.

   서양 열강이 해외로 진출한 대항해 시대는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어 黎有卓이 살았던 북부 베트남은 네덜란드가 17세기 말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다[20]. 동시에 예수회 선교사도 각지를 방문하여 포교활동을 하는 동시에 서양의 과학기술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고 의료 활동도 하였다. 曲直瀨道三이 말年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許浚의 경우에는 포르투갈로부터 전래된 화승총도 사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1592年의 임진왜란) 때, 宣宗의 피난길에 御醫로 동행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그들은 인식의 수준이나 良否의 판단은 우선 제쳐두고, 중국과 다른 문화와 과학기술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자국을 중국과 상대화하는 시사를 얻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즉, 서로 다른 곳에 살았던 이 세 명의 醫家가 잇따라 고유의 의학체계를 구축 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우선 중국 남방인이 체계화한 의학의 영향이 있었다. 동시에 대항해 시대라는 환경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상대화 현상에 주목해보면, 중국과의 지리적 거리가 상당히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과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중국 지배의 경험이 없었던 일본이 한국이나 베트남보다 더 빨리 의학의 자국화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5 결론

  한자문화권의 고의서 데이터를 定量化하여 비교•검토한 결과 일본·한국·베트남이 중국 의서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의서의 자국화를 진행한 역사에 대해 밝혔다. 이는 각 의학의 상호관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동시에 明代 남방의 醫家가 혼자서 편찬한 개성이 풍부한 각종 의서의 체계를, 일본•한국•베트남이 공통적으로 모델로 삼아 한 사람의 醫家가 자국에 적용되는 체계를 구축하였다는 유래가 없는 공통된 현상도 밝혔다.  한편, 자국화의 배경에는 이질적이고 강력한 서양문화와 접촉하게 된 시대 환경 및 중국과의 거리라는 지리적 환경이 엿보인다. 이러한 요인들이 중국과 자국과의 상대화를 촉진하여, 현재까지 연결되는 일본•한국•베트남의 고유 의학 체계의 기반을 형성시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각국의 고의서 서지를, 간행본과 대표 저작에만 주목하여 定量 해석한1단계에 불과하다. 後世方派 보다 독자화가 더 진행된 일본의 古方派, 한국의 四象醫學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검토를 생략하였다. 또한 간행본만큼 영향력이 크지는 않으나 일본·한국·베트남에서 다량으로 생산된 필사본의 해석과 이를 기초로 삼은 의학의 分科와 변천의 역사는 이후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가 완성되면, 한층 다양한 역사 현상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자문화권 의학사의 비교연구와 이후 좋은 결과를 낼 각국 연구 협력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기여하고 싶다.

謝辭:본 보고의 문헌 조사에 협력해 주신 각국의 장서기관에 깊이 감사 드린다.

문헌 및 주석

[1] 眞柳誠.臺灣訪書志Ⅰ/故宮博物院所藏の醫藥古典籍(1)~(37).漢方の臨床2002;49(1):141-161~2007;54(2):357-364

[2] 眞柳誠.ベトナム國家圖書館の古醫籍書誌.茨城大學人文學部紀要•人文學科論集2006;45:1-16

[3] 眞柳誠.ソウル大學奎章閣の古醫籍書誌(一)~(四).茨城大學人文學部紀要•人文學科論集2004;41:21-42~2005;44:13-27

[4] 眞柳誠.臺灣訪書志Ⅱ/國家圖書館〔臺北〕所藏の醫藥古典籍(1)~(31).漢方の臨床2007;54(4):675-680~2010;57(1):167-171

[5] 眞柳誠.日本の醫藥•博物著述年表(一)~(五).茨城大學人文學部紀要•人文コミュニケーション學科論集2006;1:53-76~2009;5:1-24

[6] 薛淸錄.中國中醫古籍總目.上海:上海辭書出版社;2007

[7] 가장 많이 남아있는 일본 서적 및 두 번째로 많이 남아있는 중국 서적의 경우에는 대만 장서를 포함하여 90%이상, 현재 가장 적게 남아있고 잘 망라되어 있지 않은 한국 서적 및 베트남 서적은 70%에 가까운 테이터를 얻었다고 각종 목록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90%전후라고 추측하였다.

[8] 眞柳誠.江戶期渡來の中國醫書とその和刻.山田慶兒•栗山茂久編.歷史の中の病と醫學.京都:思文閣出版;1997.p.301-340

[9] 三木榮.朝鮮醫書誌.大阪:三木榮私家版;1956. p.187-292

[10] 眞柳誠•矢數道明.「曲直瀨」姓の由來.日本東洋醫學雜誌1991;42(1):93

[11] 王鐵策•小曾戶洋.所從證經籍解說.矢數道明ら編.現代語譯•啓迪集.京都:思文閣出版;1995.p.787-795

[12] 三木榮.朝鮮醫書誌.大阪:三木榮私家版;1956.p.110-116

[13] 金重權.「東醫寶鑑」의 文獻的硏究.書誌學硏究1995;11:207-243

[14] 眞柳誠.近代中國傳統醫學と日本-民國時代における日本醫書の影響.漢方の臨床1999;46(12):1928-1944

[15] 眞柳誠.現代中醫鍼灸學の形成に與えた日本の貢獻.全日本鍼灸學會雜誌2006;56(4):p.605-615

[16]小曾戶洋(和刻本漢籍醫書總合年表.日本醫史學雜誌1991;37(3):p.407-415)의 보고에 필자의 견해를 보충하였다.

[17] 薛淸錄(注6文獻 )• 三木榮(注12文獻)• 小曾戶洋(注16文獻)및 필자의 견해에 따라 작성하였다.

[18] 中砂明德.江南―中國文雅の源流.東京:講談社;2002.p.16-24

[19] 王綸.明醫雜著.小曾戶洋•眞柳誠編.和刻漢籍醫書集成(第8輯).東京:エンタプライズ;1990.p.27

[20] 石井米雄ら.ベトナムの事典.東京:同朋舎;1999.p.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