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다

真柳誠「日本が受容した韓醫學と古醫籍の交流史(要旨、日韓国際シンポジウム)」『日本東洋医学雑誌』61巻別冊号129頁、2010年


日本이 受容한 韓醫學과 古醫籍交流史
眞柳  誠(茨城大學大學院人文科學研究科)

要旨

 いま日中韓の傳統醫學は固有の歷史と特徴を持ちつつも、かつてない相互往來の高潮を迎えている。そこで日本が受容した韓醫學と古醫籍を中心に、その歷史背景を考察したい。
  日本への韓醫學の傳來は6世紀に記錄が始まる。そして10世紀の日本醫書が引用することで、韓醫籍最古の書名・內容が知られる。このように古代から受容され續けてきた韓醫學は、豐臣秀吉の侵略を契機に最大の影響を日本に與えた。その中心は多量な朝鮮版醫書と出版技術の傳來である。影響は醫書の利用や普及にとどまらず、版式や字體の模倣までおよんだ。他方、韓醫籍や韓版醫書の學術性も高く評價され續け、復刻が重ねられていた。それら文獻には日中韓にまたがる多樣な傳承經緯と變遷が認められ、結果的には漢韓醫籍の散逸を防いだ場合もある。歷史の大河は民族・文化、そして國境も海峽も容易に超越して連動させる。醫學といえども、その例外ではありえない。日中韓の醫學が渾然一體となって變化し、固有の發展を遂げてきた歷史を、いま我々は思い起こすべきだろう。

(補足全文:金成俊翻訳 →日本語版

1 緒言

「不通朝鮮醫學、不可以說日本及中國醫學」
 故・三木榮氏는 『朝鮮醫學史及疾病史』를 完成시킨 1948年 自序에 이 一文을  漢文으로 기술하였다. 漢字가 3國의 歷史的 通用文字인 동시에 醫學도 一體 不可分이기 때문이다.

 한편 傳統文化研究는 自國中心인 경우가 普通이며 대개 傳統醫學研究現況도 例外라고는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東아시아의 傳統醫學은 容易하게 國境이나 海峽을 넘어서、各民族醫療의 血肉으로 되어있다. 日中韓 3國의 경우 이것이 두드러져 있다. 現在、日中韓의 傳統醫學은 固有의 歷史와 特徵을 갖이면서도、과거에 볼수없는 相互往來의 高潮를 맞이하고있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日本이 受容한 韓醫學에 관에서 古醫籍交流史 측면에서 叙述하겠다.

2 韓醫籍

  韓半島 三國에서 新羅時代 醫書로 『百濟新集方』『新羅法師方』이 있었던것을 平安時代의 丹波康頼 『醫心方』(984)의 引用에서 알수있다. 10世紀부터 高麗時代에는 『濟衆立效方』 『御醫撮要方』 『鄕藥救急方』등 韓醫籍이 있었으며 거의 刊行되어 있었다. 다만 現存하는 것은 『鄕藥救急方』뿐이며 宮內廳에 唯一하게 所藏되어있다.

 三木氏가 報告한 韓醫籍은 200書以上이며 저의 近年調査로는 300書 정도의 분량 이되는 可能性이 있다. 그러나 豐臣秀吉軍가 略奪했으므로 인해 朝鮮初期 韓醫籍은 현재 대부분이 日本에 現存한다. 朝鮮時代은 活字印刷가 활발했지만 當時技術로서는 印刷數에 制限이 있었기에 醫書라도 朝鮮 活字本의 現存는 적다. 朝鮮醫書의 白眉는 敕撰의『鄕藥集成方』『醫方類聚』『東醫寶鑑』등이며 특히 『東醫寶鑑』(1613)의 評價는 높다고 할수 있다. 醫方類聚』全266卷은 敕命으로 金禮蒙등이 1443年에 編纂을 開始, 1477年에 30組가 印刷되었다. 이것이 朝鮮時代 단 1回出版이며 지금 日本宮內廳에 1組、서울郊外의 韓獨醫藥史料室에 宮內廳 缺落部分의 零本이 現存한다.

 宮內廳本은 원래 多紀氏 江戶醫學館 藏書이며 明治維新後 大學東校 → 淺草文庫 → 帝室博物館 → 宮內省에 移管되어 現在에 이르렀다. 本書는 中國醫書153種以上의 引用文을 類集한다. 이것 引用書는 中國의 唐・宋・元・明初에 걸쳐서、그 중 約40書는 現存하지 않다. 現存하는 書라해도、本書의 所引底本는 散佚된 古版本의 경우가 많다. 그러므러 江戶末期의 考證學者는 本書를 研究하고、所引文에서 30數書를 復原했다.

3 韓版漢醫籍

 新羅에서는 唐令에 의해 모방한 醫學敎育制度를 692年에 制定하며 漢醫籍을 敎科書로 定하고 있다. 韓國의 漢醫籍刊行은 中國과 거의 前後해서 빠르며 高麗時代1058年과 1059年에는 『(仲景)五藏論』등도 出版되어 있었다. 朝鮮前期에는 最盛期를 맞이하여 多數의 醫書가 活字出版되었지만 거의 모든 것이 中央이나 地方政府 刊行物이었다. 豐臣秀吉의 侵略으로 國力이 疲弊한 以降 出版도 減少했지만, 19世紀前後부터 商業出版도 普及하며 약한 增加했다. 日本統治以前의 1909年까지는 韓國어서 覆刻된 漢醫籍은 93種이 現存한다. 모두 宋代에서 淸代까지의 醫書이며  朝鮮版이 現存唯一이나 最善本인 경우도 있다. 대부분 1~3回覆刻이지만 三木氏報告에 眞柳知見을 카미하여 覆刻 5回以上의  書를 아래에 제시하고자 한다.

 1)『銅人腧穴鍼灸圖經』9版 2)『黃帝內經素問』6版 3)『醫學正傳』6版 4)李梴『醫學入門』6版 5)『東垣十書』5版. 이들 5書는 1909年刊의 『醫學入門』以外 모두 朝鮮政府刊行物이며 國家로서 重視한 書라고 할수있다. 覆刻回數 第一과 第二는 基礎醫學書이며 北宋政府編纂物 第三以下는 醫學全書 내지 叢書이며 明代民閒編刊物라는 特徵이 있다. 특히 明代醫學全書의 覆刻이 많은 點은 월남版이나 日本江戶版도 같으며 3國 모두 出版된 書에 『醫學正傳』『醫學入門』『萬病回春』가 있으며 이 共通된 流行은 注目된다. 따라서 明代醫書의 各國版數를 表에 제시하지만 이것들이 中國明代와 同樣 혹은 그 이상 日本・韓國에서 受容되어있었던 상황을 알수있다. 高溫多濕과 戰亂으로 現存書가 적은 월남도 같은 상황의 可能性도 있을것이다.

  近世以降 日本醫學을 體系시킨것은 16世紀 曲直瀨道三 『啓迪集』 韓國醫學은 17世紀 許浚『東醫寶鑑』 월남醫學은 18世紀 黎有卓『醫宗心領』이며 어느것이나 醫家 한사람에의한 醫學全書이다. 이 3書에 많이 引用된 것도 明代의 醫家 한사람에의한 醫學全書이며 『醫學入門』引用은 韓國・월남 2書 다 筆頭 『醫學正傳』

明代醫書의 各國版數(월남版은 最低數

書名(中國初版年)

明版

日本版

韓國版

월남版

玉機微義(1396)

8

5

1

0

東垣十書(1399-1424)

7

5

5

0

醫林集要(1482)

4

2

1

0

醫學正傳(1531)

5

11

6

1

醫學入門(1575)

5

8

6

2

萬病回春(1588)

7

20

4

1

雲林神彀(1591)

4

5

0

1

壽世保元(1615)

1

1

0

1

 引用은 日本에서 筆頭 韓國에 6番째였다. 『醫學入門』과 『醫學正傳』은 各國 醫學體系化의 모델로 된 可能性도 推測된다. 또 『啓迪集』에서눈 時期的 相違로 利用되지 않았지만 明代17世紀 『萬病回春』 『雲林神彀』 『壽世保元』도 引用이나 覆刻이 共通해서 인정할수 있다. 日本・韓國・월남은 아주 근사한 意識으로 醫學의 自國化를 진행했던 것이다.

4 古代渡來人과 韓醫籍・漢醫

  日本의 要請으로 百濟부터 採藥使인 潘量豐과 丁有陀가 554年에 來日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醫藥書도 持參했을 것이다. 한편 高句麗와 싸운 大伴連狹手彦은 562年에 智聰을 高句麗부터 데리고 왔다. 智聰은 「內外典・藥書・明堂圖164卷」等 漢醫籍을 將來하고 이것이 日本에 醫書가 傳해진 最古記錄이다. 602年에는 百濟僧인 勸勒이 來日하고 「方術之書」等을 持參했다.

 이와같이 韓半島渡來人이 中世日本에 가져온 韓籍・漢籍醫書는 적지 않다. 近世도 鎌倉幕府 金澤文庫 舊藏書에 韓版이 있으며 鎌倉나 室町時代에도 対馬島등을 경유한 交易으로 韓籍이나 韓版이 들어와 있었다.

5 豐臣秀吉의 侵略과 傳來醫籍

 1592~98年에 二回의 豐臣秀吉侵略으로 大量의 韓醫籍이나 韓版漢醫籍이 日本에 傳來했다. 그들 醫書는 80種 以上이며 거의 官醫인 曲直瀨正琳 (養安院)에게 贈與되었다. 前述의 『醫方類聚』는 加藤淸正軍의 戰利品이라고하는 1組를 伊達藩醫인 工藤平助가 所有하고 있으며 그것을  江戶醫學館인 多紀元簡이 購入했다. 秀吉軍은 活字印刷工도 捕虜로 했으며 日本에서는 醫書도 活字出版이 急激히 流行했다. 그 以前에는 日本에서 印刷出版(木版)된 醫書는 2書밖에 없다.

6 朝鮮版의 影響과 古活字版醫

 朝鮮의 活字技術로 日本의 醫書出版은 아주 盛行했다. 이것을 古活字版醫書라고 말하며 江戶初期인 約1630年代까지 계속된다. 350年後인 現在도 50種以上의 古活字版醫書가 現存하므로 約40年새에 아마 200種가량 出版되었던 것이다. 嚆矢로 생각되는 1595年刊 『醫方大成論』과 『本草序例』는 日本에서 漢籍부터 拔粹・改編한 書이지만 『本草序例』의 底本은 朝鮮版이다. 兩書는 그 후도 覆刻이 되어 江戶初期에 걸쳐서 대단히 流行했다.

 初期 古活字版의 字形은 朝鮮版에 상당히 닮고있다. 版面은 幅廣이며 이것도 朝鮮版의 影響일 것이다. 曲直瀨玄朔이 出版에 關與했뎐 1605年刊 古活字版 『玉機微義』는 版面・字形・料紙에서 表紙까지 朝鮮版에 酷似하다. 또 室町時代에서 이어진 和装本 表紙도 朝鮮式이며 中國式하고는 전혀 다르다.

7 韓醫籍・韓版醫書와 江戶의 覆刻

 古活字版 醫書時代는 約40數年으로 끝난다. 1640年代부터는 朝鮮版으로 바뀌고 明後期萬曆版의 影響을 받은 木版醫書가 서서히 늘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印刷技術의 變化뿐이며 韓醫籍이나 韓版醫書의 影響은 아직 이어진다. 예들어 京都・大森文庫所藏인 朝鮮版 『經史證類大觀本草』는 養安院舊藏書이며 元版늘 覆刻한 善本이다. 이러한 理由로 幕府醫官인 望月三英은 朝鮮版을 底本으로 校訂하고 1775年에 和刻版을 完成했다. 本書는 元版 →朝鮮版 →江戶版으로 變遷했으므로 韓版을 걸쳐서 漢籍醫書를 日本이 受容한 例라 할수있다.

 一方、江戶時代에서는 鎖國體制때문에 朝鮮醫書의 渡來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東醫寶鑑』의 內容에 注目한 德川吉宗은 醫官에 校訂시키고 覆刻하며 1724年과 1730年에 京都의 書店에서 發賣했다. 江戶時代初의 官版醫書다. 1799年에도 大坂에서 同版木으로 後印되며 1811年과 1837年에는 各一部가 淸國에 輸出되었다. 明治로되면  同版木까지 淸國廣東에 輸出되어 1890年에 重印되어 있다. 이 和刻廣東版 『東醫寶鑑』은 월남에도 普及했다. 이것이 韓籍이 朝鮮版 →江戶版 →淸版의 순서로 覆刻되어 日本・中國・월남에 受容된 例라고 할수 있다.

 한편 江戶의 將軍即位에 應해서 12回에 걸쳐서 來日한 朝鮮通信使는 良醫나 醫員이라고 불렀던 醫官을 同行한 일이 많았다. 그들은 鎖國日本에 왔던 소수의 外國人 醫家이므로 對馬와 江戶를 往復하는 各地에서 日本醫家가 그들을 訪問했다. 그 醫事問答등을 모은 記錄은 많으며 그 중에는 醫書에 관한 質疑應答도 볼수 있다.

8 喜多村直寬의 『醫方類聚』覆刊

 江戶後期부터 明治初年에 再流行한 近世의 活字版을 多量으로 出版했던 것은 幕府醫官인 喜多村直寬(1804~76)이다. 그 중에 韓醫籍인 『醫方類聚』 266卷・264册이 있다. 全 266卷의 出版에는 巨費가 必要하여 直寬은 1852年에 德川將軍부터 100兩을 빌려 다음 해부터 每年 10兩을 返濟하였다 한다.

 1852年 本書出版이 開始되었다. 覆刊底本으로 했던 多紀氏 所藏인 朝鮮版은 全體로計12卷이 결락 되어있었다. 그래서 直寬은 同僚인 澁江抽齋에게 부탁하여 諸書에서 缺落部分는 補足하고 있다. 그리고 10年後인 1861年 活字覆刊이 完結했다. 朝鮮의 初版부터 約400年 第二版이 日本에 誕生했다. 그러나 直寬版도 日本・中國・韓國에 約十組밖에 現存하지 않는다.

 明治九年(1876) 日本과 朝鮮政府사이에 修好條約이 締結되었다. 直寬은 外務理事官인 宮本小一에게 위탁하고 最適의 禮品으로서 『醫方類聚』를 朝鮮政府에 贈呈했다. 自國어 오래 상실했던 『醫方類聚』를 再會한 朝鮮의 醫官들은 直寛의 義舉를 대단히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贈呈手續書와 朝鮮政府謝辭의 사본이 下賜된것은 直寛이 同年十二月에 돌아간 후 이었다.

 이 直寬贈呈本을 원본으로 韓國에서는 日本支配下에서도 出版이 二回計劃되었지만 朝鮮戰爭때문에 斷念했다. 戰後 1965年 韓國의 東洋醫科大學 지금의 慶煕大學校韓醫科대학은 總計4893名을 動員해서 直寬版을 模寫하고 影印出版했으므로 本書는 드디어 自國에서 널리 利用되기 시작했다. 當影印本은 臺灣에서도 再影印出版되어있다. 北京人民衛生出版社도 直寬版을 기본으로 活字本을 1982年에 냈다. 그러나 그 1~4册은 內容一部를 荒唐無稽라는 判斷느로 削除. 게다가 全册에 걸쳐서 各書의 引用語句를 通行本으로 改惡하는등 현저히 面目을 잃고있다. 2002年에는 北京의 九州出版社가 直寬版을 直接影印出版하고 있다. 이와같이 本書는 朝鮮 →日本 →韓國 →臺灣, 또 日本 →中國라는 經由로 世界에 普及되어져 있다.

9 明治期의 醫書流出

 明治政府는 傳統醫學을 公認하지 않고 植民地로서 台湾・韓半島에서도 같은 政策을 實施했다. 한편 中國大陸은 간신히 傳統醫學을 存續할수 있었다. 그 때문에 日本에서는 거의 無價値로 된 傳統醫學文獻이 많이 세상에 流出하며 이것을 購入한 淸國人도 많다.

 當時 文獻蒐集한 中國學者에는 1890年에 來日한 楊守敬, 1898年에 來日한 李盛鐸, 1901年에 來日한 羅振玉, 1909年에 來日한 丁福保등이 있다. 그중 楊守敬의 藏書가 最大이며 現在는 台北故宮博物院에 大部分이 保存되어 있다. 李盛鐸의 藏書는 그 다음이며 지금 北京大學圖書館에 있다. 거기에는 日本舊藏의 韓醫籍・韓版醫書도 적지 않다. 물론 그들의 蒐集, 더 覆刻에 의하여 消滅을 면한 貴重文獻도 수많다.

 예를들어 朝鮮醫書인 『醫方類聚』 『鍼灸擇日編集』 『東醫寶鑑』 『濟衆新編』等에는 現代 中國版도 있으며, 前3書는 日本版을 介在하고 있다. 즉 明治維新後에 來日한 淸의 羅嘉傑은 養安院의 舊藏書에도 있었던 『鍼灸擇日編集』 寫本을 入手하며 그것을 1890年에 日本에서 覆刻. 더 나가 淸國에서 翌年, 翌々年에 羅嘉傑本이 再版되어 이 再版本은 1987年에 北京中國書店에서 影印覆刻되어 國外에도 輸出되어 있다. 따라서 朝鮮韓籍→日本寫本→日本版 →淸版 → 北京影印版 → 日本・韓國이라는 變遷을 거치고 있다.

 中國에 流出한 版木도 있다. 當時 中國에서 日本版木을 購入하고 印刷한 醫書는 23種, 日本에서 入手한 漢韓醫籍도 覆刻한 것은 10種, 日本文獻에서 復元出版한 漢籍醫書는 4種, 和醫書 46種도 出版되어 있다.

 日本은 江戶時代까지 約1300年閒, 거의 一方的으로 醫學・韓醫學을 受容해 왔다. 그래서 蓄積된 文獻이나 研究一部가, 공교롭게도 暗黑의 明治時代 日本을 떠나, 차차 近隣國의 이전의 學恩에 얼마간이라도 보은한 것이다.

10 結語

 日本・韓國의 傳統醫學은 中國影響下에서 發展하면서, 各々 固有體系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中國의 影響만을 一方的으로 받아온 것은 아니다. 3國의 相互往來는 특히 醫學文獻에서 顯著했다. 만약 지금 文獻의 相互往來가 주어진 影響을 나라마다 論한다면 가장 남의 2國의 恩惠를 받은것은 日本傳統醫學이라도 斷言해도 問題없다. 中國만이 아니라 韓國이 日本에 주어진 影響도 多方面에 미쳤던 것을 歷史는 充分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후에 日本이 傳統文獻을 傳承・保存하며 斯界에 貢獻하는 일에 이어지고 있다. 나아가서 同類事象은 日本에 한정되지않고 韓醫學에도 存在하는것을 조금이나마 例證하였다.

 歷史의 大河는 民族・文化, 그리고 國境도 海峽도 容易하게 超越하여 連動시킨다. 傳統醫學도 例外는 아니었다. 앞으로 各國의 研究協力이 一層 進展한다면 더욱 當方面의 史實이 解明되는것은 틀림없다. 同時에 그것은 現代에 있어서 새로운 相互發展의 歷史도 創出해 나갈 것이다. 日中韓의 醫學이 渾然一體로 되어 變化하며 固有의 發展을 이루어진 歷史를, 지금 우리는 想起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