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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야기 마코토「한국 전통의학 문헌과 일본·중국·한국의 상호전파」、안 용수『2007년도 이바라키대학·
인제대학교 공동개최 학술심포지엄「한일 문화 교류 - 과거와 현재 - 」논문발표집』、p.81-88、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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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의학 문헌과 일본·중국·한국의 상호전파

마나야기 마코토(이바라키대학 인문학부 교수. 중국 과학사)

마야나기 마코토(MAYANAGI Makoto) 인문학부 중국과학사
1950년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의학사・초목사・의약 문화 교류사• 의약서지학. 문화로서의 중국 의학이 한자 문화권 각국에 수용되어, 한층 더 발전/고유화되어 온 역사를 문헌학 수법으로 연구. 최근 10년은 중국・일본・한국・대만・베트남・몽골의 현존 고의적(古醫籍)의 실개 조사(悉皆調査)를 하고 있다. 주요 편저에 『和刻漢籍醫書集成』 전16권(엔타프라이즈), 『海外回歸中醫善本古籍叢書』전12권(인민위생출판사) 등이 있다.


1. 머리말

  「不通朝鮮醫學、不可以說日本及中國醫學」(불통조선의학, 불가이설일본급중국의학) 故 三木榮(미키 사카에)씨가 『朝鮮醫學史及疾病史』(『조선의학사급질병사』)를 완성한 1948년, 서두에 이 한 문장을 굳이 한문으로 적었다[1]. 한자가 세 나라의 역사적 통용문자로, 의학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일체감에서였으리라 짐작된다.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의학의 역사는 깊고, 그로 인해 의학 연구를 위해서는 역사적 문헌의 파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의서는 실용서이기에, 경서에 비해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다. 이런 과정으로 전승해 오면서, 서지(書誌)는 다양하게 변화했고, 그로 인해 문헌의 정확한 파악이 힘들게 되었다.

  한편,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는 보통 자국 중심이고, 대부분 전통 의학연구의 현황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전통의학은 한자라는 통용문자에 의해 쉽게 국경이나 해협을 건너 전파되어졌다. 그리고 각 민족의 의료에 있어, 피가 되고 살이 되면서, 문헌에도 변화를 주게 된다. 일본·중국·한국의 세 나라에서는 이런 현상이 현저하게 보이고 있다. 세 나라의 상호 문헌 전파를 무시한다면, 또 그 역사적 배경을 등한시한다면, 자칫 근본이 없는 경험의학에 빠질 위험성이 높아질 것이다.

  현재, 일본·중국·한국의 전통의학은 고유의 역사와 특징을 간직하면서, 여짓껏 없었던 상호왕래의 흐름을 맞이하고 있다. 이 흐름에 맞추어, 본 논술에서는 한국의 전통의학 문헌을 중심으로, 그 다양한 변화에서 지금 볼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분석하고, 일본·중국·한국의 상호전파를 고찰하려고 한다. 


2. 한국서적과 한국출판의 의학문헌

2-1 한국 의학서적


  한반도의 삼국시대에서 신라의 의서에,『百濟新集方』(『백제신집방』), 『新羅法師方』(『신라법사방』), 이 있었다는 것을 일본의 丹波康賴(단바 야스요리)의 『醫心方』(『의심방』)(984)  의 인용에서 알 수 있다[2]. 10세기부터  고려시대에는 『濟衆立效方』(『제중립효방』), 『御醫撮要方』(『어의찰요방』), 『鄕藥救急方』(『향약구급방』)등 의 한국 의학서적이 있었고, 그 대부분이 간행되었다는 사실도 후대의 인용문 등에서 추정할 수 있다[3]. 단지, 현존하는 것이『鄕藥救急方』뿐이고, 그것도 이조시대 재판되 어 宮内廳書陵部(궁내청 서릉부)에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다.

  이조시대의 한국 의학서적은 수의학 등의 관련 분야를 포함해 200 권 이상 있다[4]. 그러나, 나중에 서술하겠지만,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약탈했기에, 이조 초기의 많은 한국 의학서적이 일본에 현존하고, 이는 한국 출판의 한(漢)의학서적을 포함해 70부 이상이라고 한다[5]. 『東醫寶鑑』(『동의보감』)등 이조 중후기의 한국 의학서 적은 중국에도 많이 현존한다[6]. 한편, 이조시대는 목판인쇄와 함께 활자인쇄도 활발했다. 물론 당시의 기술로는 인쇄수에 제한이 있었고, 의서에서도 이조 활자본은 현존하는 것이 아주 적다.

  이조 의학서적의 백미로 뽑기로는 『鄕藥集成方』(『향약집대성』),『醫方類聚』(『의방류취』), 『東醫寶鑑』 등으로, 특히『東醫寶鑑』(1613)의 평가는 높다. 또 1477년에 30 조만 활자인쇄된『醫方類聚』 전 266권은 당, 송, 원, 명 초기의 의서 153 종 이상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본·중국·한국 세 나라의 최대의 의서다. 그 인용서 중 약 40종은 이미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 서적으로 사료가치가 높고, 江戸(에도) 말기의 의관들은 그 인용문으로 30 을 넘는 인용 서적을 집필했을 정도다[7].

2-2 한국출판의 漢(한)의학서적

  어림잡아 唐代(당대)에 해당하는 신라에서는, 당의 지령으로 의학 교육제도를 692년에 제정하고, 漢(한)의 의학서적을 교과서로 정했다[8]. 그 중 하나인, 漢代(한대)의『鍼經』(『침경』)9권이 중국 北宋代(북송대)에 이미 없어졌으나 고려에는 현존했었다. 여기에서 1091년의 북송 정부가 요구로 고려 정부가 『鍼經』을 헌상하고, 1093년에 북송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러한 북송판『鍼經』9권은 南宋代(남송대)1155년에 제목을『靈樞』(『영추』)로, 권수도 24권으로 개정해 復刻(새로이 활자화)했다[9].

  그러나 고려의『鍼經』도 북송의『鍼經』도 남송판『鍼經』도 지금은 없어져, 明版(명판)이후의『靈樞』 계통의 것만이 현존한다.. 즉, 本書(본서, 원래 서적)는,  漢代『鍼經』9卷(한대『침경』9권)→唐(당)→新羅(신라)→高麗『鍼經』9卷(고려 『침경』9권)→北宋版『鍼經』9卷(북송판『침경』9권)→南宋版『靈樞』24卷(남송판『영추』24권)→이후의 판본> 으로서 현대에 전해졌다. 신라, 고려의 전승이 없었더라면, 중국 의학의 기본 고전의 하나를 잃게 되었으리라는 건 틀림없다. 덧붙이자면, 『鍼經』은 일본에서도 大寶律令(대보율령)에 따라 교재로 지정되었지만, 平安(헤안)시대 이후 원래 판본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대략 북송에서 元代(원대)에 상당하는 고려 시대에는, 1058년과 1059년에 『五藏論』(『오장론』)등의 한(漢)의 의학서적이 출판되었다[10]. 그렇지만 어느 것도 전승되지 않고, 『醫方類聚』에 일부분의 인용문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대략 중국 明初(명초)부터 淸 (청)에 해당하는 이조 시대에 다시 활자화한 한(漢)의 의학서적은, 이조판이 전승되는 유일한 것이며 으뜸가는 서적인 경우도 있다[11]. 특히 명의 1425년에 서간된 침과 뜸에 관한 의서인 劉瑾(유근)의 『神應經』(『신응경』)은, 여러 기묘한 경위로 지금까지 유포되고 있어 흥미롭다[12].

  다시 말해, 室町(무로마치)시대 1473년, 畠山(하타케야마)씨의 使節副使(사절부사)였 던 승려인 良心(료신)이 본서와 일본의 和氣(와키)씨와 丹波(단바)씨의 廱疽灸法(옹저 구법)인 「八穴灸法」(「팔혈구법」)을 이조에 헌상했다. 그 다음해 1474년 이조 정부는 그 두 서적을 활자화했고, 그 이조판이 豐臣秀吉의 침략으로 일본으로 다시 들어오고, 에도 시대 1645년에 다시 한번 활자화되었다. 1990년에는 에도의 재활자화판을 기본으로 한 활자본이 北京(북경)의 中醫古籍(중의고적)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그 중국판 재재활자판은 일본과 한국으로 유출되었다. 이렇게 본서는, <明版(명시대의 판본)→室町畠山氏(무라마치 하타케야마씨)→李朝版(이조판)→江戸版(에도판)→北京版(북경판)→ 일본·한국> 이라는 550년 이상의 세월을 걸쳐 세 나라간의 전승의 과정을 밟아, 현대에 유포되어지고 있는 것이다[13].  단지 중의고적 출판사본의 교정자는 그 책이 이조판을 거친 사실을 전혀 알지 못 한 채, 전승 경위뿐만 아니라 연대 관계까지도 심하게 착오한 전언을 기록하고 있다.


3. 일본과 한국 의학서적과 한국출판의 漢(한)의학문헌

3-1 고대 도래인과 한국 의학서적・漢(한)의학서적


  일본의 요청으로 백제에서 採藥使(채약사)인 施德(시덕)・潘量豐(번량풍)과 固德(고덕)・丁有陀(정유다)가 554년에 일본에 왔다. 분명 그들은 의약서도 가지고 왔을 것이다. 한편,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웠던 大伴連狹手彦(오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는 562년 귀국할 때 呉(오)나라 자손인 智聰(지총)을 고구려에서 데려고 왔다. 지총은「内外典・藥書・明堂圖164卷」(「내외전・약서・명당도164권」)등의 漢(한)의학서적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가 일본에 의서가 전해졌다는 기록 중,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602년에는 백제의 승려인 勸勒(권늑)이 일본에 오면서「方術之書」(「방술지서」)등을 가지고 왔다고 하나, 그것이 어떤 서적이었는지는 기록에 없다[14].

  이처럼 백제나 고구려에서 일본에 온 이들 중에, 의약 지식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고 여겨진다. 일본의『醫心方』에『百濟新集方』, 『新羅法師方』이 인용되는 것을 보아도, 도래인이 가지고 온 한국서적・漢(한)서적의 의서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鎌倉幕府(가마쿠라 마쿠후)때 金澤文庫(가나자와 분코)의 옛 소장서에 한국 출판서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가마쿠라나 무로마치 시대에도 對馬(쓰시마)등을 거친 교역으로 한국서적이나 한국출판 서적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전래 의학서적

 일본에 대량으로 한국 의학서적이나 한국 출판 漢(한)의학서적이 전래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에 의해서다[15][16]. 1592년에 히데요시 군대가 약탈한 서적은 배 수 척분, 수레 수 대분, 수 천 권에 달했다고도 전해진다. 더우기 활자 인쇄공까지 데리고 왔으므로, 일본에서는 의서의 활자 출판도 급속도로 유행했다. 그 이전에 일본에서 인쇄 출판된 의서(목판 인쇄)는 겨우 2 권에 불과했다. 이조 활자기술의 전래가 당시의 일본에 미친 영향은 거대했다.

 당시 가지고 들어온 상당량의 의서가 宇喜多秀家(우키타 히데이에)나 히데요시 등으로부터 官醫(관의)인 曲直瀨正琳(마나세 쇼린)(養安院,(요안인))에게 증여된 듯하다.  三木(미키)씨는 요안인에 소장되어 있었던 의학 관계의 한국 서적과 한국출판 漢(한)서적의 책 제목 약 50 종을 여러 사료에서 채록하고 있다[17]. 앞에서 기술한 이조판『神應經』도 그 사본을 요안인이 소장하고 있었다. 물론 요안인 이외의 경로로 전해져 남아 있는 한국 의학서적도 많다. 예를 들어, 이조에서 1477년에 30 조만 인쇄되었던『醫方類聚』는,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군대의 전리품이라고 전해 지는 한 조를, 에도 醫學館(의학관)의 多紀元簡(다키 겐칸)가 伊達(다테)의 담당의사였 던 工藤平助(구도 헤스케)에게서 구입했다. 이것이 明治(메이지)이후 <大學東校(대학 동교)→内閣文庫(내각 문고)→宮内廳書陵部(궁내청 서릉부)> 로 전해져 현존하고 있다[18]. 이조판의 完本(완본)은 전 세계에서 이 한 조밖에 없다.

  한편, 나중에 古(고)활자 의서의 출판에도 관여한 관의인 曲直瀨玄朔(마나세 겐사쿠)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1592년 毛利輝元(모리 데루모토)를 치료하기 위해 바다 를 건넌다. 그 곳에서 한국출판의 漢(한)의학서적『山居四要』(『산거사요』)을 손에 넣고, 데루모토의 청으로 발췌서를 일본어로 작성했었다. 한국 출판을 거친 漢(한)의학 서적을 일본이 수용한 일례다. 서적에만 국한되지 않고 의원들도 포로로 잡혀 왔다. 에도 시대 1780년에 간행된 木村元貞(기무라 겐테)의『鍼灸極秘傳』(『침구극비전』)의 서문에, 이조의 의관인 金德邦(김덕방)이 慶長(요시나가) 집권 중에 永田德本(나가타 도쿠혼)에게 전수한 기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기록이 남아 있는, 이조로부터 온 도래 의원은 전해지는 사료에서만 10 명이 넘는다.
 
3-3  이조판의 영향과 古(고)활자판 의서

  1592년의 침략으로 얻게 된 이조의 활자 기술로, 앞서 기술했듯이, 일본의 의서 출판은 한번에 급속도로 성행하게 되었다. 이를 고활자판 의서라고 하며, 에도 초기 약 1630년까지 계속된다.  350년 후인 현재에도 50 종 이상의 고활자판 의서가 현존하 므로[19], 고활자판 의서가 성행했던 그 약 40년간 200 종에 가까운 의서가 출판되었으 리라 추정한다. 그 시발점이라고 일컬어지는 1595년에 간행된『醫方大成論』(『의방 대성론』)과『本草序例』(『본초서례』)는 둘다 일본에서 漢(한)서적으로부터 발췌하 고 개편한 서적이다[20][21]. 『本草序例』의 토대가 된 서적은 이조판이라고 한다. 두 서적은 이후에도 계속 활자화되면서 에도 초기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초기 고활자판의 글자 모양은 이조판과 물론 비슷한데, 이조 활자도 명대 전기부터 중기까지의 글자 모양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글자 모양이 계속 변화해 가면서 간접적으로 전해진 셈이다. 고활자판의 版面(판면)은 폭이 넓은데, 이것도 이조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마나세 겐사쿠가 출판에 관여한 1605년에 간행된 고활자판『玉機微義』(『옥기미의』)는[22] 판면, 글자 모양, 용지까지 이조판과 아주 흡사하다. 활자판은 목판보다 오자 수정이 용이하기 때문에 정확한 텍스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에도 초기의 의학 교육기관용으로 여러 종류의 의서가 사적으로 출판되었을 것이다.

3-4  한국 의학서적・한국출판 의서와 에도의 재활자화
 
  고활자판 의서의 시대는 약 40년으로 끝난다. 1640년대부터 이조판 대신에 명 후기 의 萬曆版(만력판)의 영향을 받은 목판 의서가 서서히 늘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인쇄 기술의 변화에 불과해, 한국 의학서적이나 한국출판 의서의 영향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京都(교토)의 大森文庫(오모리 분코)소장의 이조판 『經史證類大觀本草』(『경사증류대관본초』)는 요안인의 옛 소장서인데, 원판을 재활자화한 좋은 책이다. 마쿠후의 의관인 望月三英(모치쓰키 산에)가 이조판을 토대로 해서 교정하고[23][24], 산에가 타계한 뒤 1775년이 되어서야 아들인 草玄(소겐)의 노력으로 일본어판이 완성되었다. 일본어판 유일의『證類本草』였다. 이 서적도 <元版(원판)→李朝版(이조판)→江戸版(에도판)> 으로 변천한 것으로, 『山居四要』와 같이 한국출판을 거친 漢(한)의서를 일본이 수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에도 시대에는 쇄국 체제였기에, 이조 의서가 전해지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東醫寶鑑』의 내용에 주목한 德川吉宗(토쿠가와 요시무네)는 의관에게 교정하 게 하고 재활자화해, 1724년과 1730년에 교토의 서점에서 발매했다. 에도 시대,  처음으로 官(관)이 출판한 의서였다. 1799년에도 大坂(오사카)에서 같은 판목으로 다시 인쇄되었고, 1811년과 1837년에는 각 한 부가 청국으로 수출되었다[25].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그 목판까지 청국에 수출되어지고, 1890년 다시 인쇄되었다[26]. 이것은 한국서적 이 <李朝版(이조판)→ 江戸版(에도판)→淸版 청판)> 의 순으로 재활자화되어, 일본과 중국에 수용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에도의 장군 즉위 때 마다 12 회에 걸쳐 일본으로 온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는 良醫(양의)나 醫員(의원)이라 불리는 의관을 동행시킨 적이 많았다. 쇄국의 일본에 온 외국인 의사는 아주 소수였고, 그들은 그러했기에, 쓰시마와 에도를 왕복하는 각지에서 일본의 의사들이 그들을 방문했다. 그 당시의 의료 관계의 질의응답을 모은 기록이 많은데, 그 중에는 의서에 관한 질의응답도 볼 수 있다[27].

3-5  喜多村直寬
(기타무라 쵸쿠칸)의 『醫方類聚』재간행

  에도 후기부터 메이지 초에 다시 유행한 근세의 활자판에는 의서가 많은데, 100 종 가까이나 출판되었다[28]. 다시 유행한 이유는, 양보다 질을, 그리고 적은 경비가 요구되는 학술성 높은 의서의 간행이, 이 시대에 들어와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량으로 활자판을 출판한 이는 마쿠후 의관인 기타무라 쵸쿠칸이었다[29]. 쵸쿠칸은 1851년부터 1873년까지 17 종의 서적을 자비로 출판했다. 그 중에는 漢(한)서적류의 책으로『太平御覧』(『태평어람』) 1000권・153책과 한국 의학서적『醫方類聚』266권, 264책 등, 아주 방대한 서적도 있다. 『醫方類聚』는 마쿠후로부터 돈을 빌리고 10년을 걸려 활자 재인쇄를 1861년 스스로의 힘으로 완결시켰다.

 1876년에 이조 정부와 메이지 정부와의 수호조약이 체결될 때, 쵸쿠칸은 안성마춤의 예물품로 스스로 출판한『醫方類聚』를 증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로부터 이조 정부에 헌상되었다. 자국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본서를 접한 이조의 의관들은 쵸쿠칸의 업적을 크게 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조 정부로부터 감사의 서한을 받기 직전에, 쵸쿠칸은 그 생애를 마쳤다.

  1965년 서울의 동양의학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한의학과)는 총 4893명을 동원해서 쵸쿠칸판을 모사하고, 영인 출판했다[30]. 드디어『醫方類聚』가 고국에 보급된 것이다. 1982년 북경의 人民衛生(인민위생)출판사가 쵸쿠칸판에 기초한 활자본을 출판하여, 중국과 일본에 유포하였다. 단 북경판의 1-4 책은 내용이 일부 미신이라고 판단해 삭제하고, 게다가 책 전체에 인용된 문장을 열악한 유행판본으로 대신하는 등, 그 황당한 개정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어쨌든 한국 의학서적인『醫方類聚』는, <李朝版(이조판)→直寬版(쵸쿠칸판)→韓國版(한국판)또는 李朝版(이조판)→直寬版(쵸쿠칸판)→北京版(북경판)> 이라는, 3개국간 약 500년이란 시공을 넘어서 현재로 전승되어지고 있다.

3-6  메이지 시대의 의서 유출

  메이지 정부는 전통의학을 공인하지 않고, 식민지인 대만과 한반도에서도 같은 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겨우 전통의학이 존속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거의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 전통의학 문헌의 많은 부분이 항간에 유출되고, 그것을 구입한 청국인도 많았다.

  당시 문헌을 모은 중국 학자로는 1890년 일본으로 온 楊守敬[31], 1898년에 일본으로 온 李盛鐸[32], 1901년에 일본으로 온 羅振玉[33], 1909년에 일본으로 온 丁福保[34]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楊守敬의 소장서가 최대로, 현재는 台北의 故宮博物院에 대부분 보존되고 있다. 李盛鐸의 소장서는 그 다음으로 지금 북경대학 도서관에 있다. 소장서에는 옛날 일본이 소장했던 한국 의학서적과 한국 출판 의서도 적지 않다. 물론 그들의 수집, 나아가 재인쇄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현존할 수 있었던 귀중한 문헌도 많다[35].

  예를 들면, 이조의서인『醫方類聚』,『鍼灸擇日編集』(『침구택일편집』),『東醫寶鑑』,『濟衆新編』(『제중신편』)등은 현재 중국판도 있고, 앞의 세 서적은 일본판을 거친 것이다. 부언하자면,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으로 온 청의 羅嘉傑은 요안인의 옛 소장서였던『鍼灸擇日編集』의 사본을 입수하고, 그것을 1890년에 일본에서 재활자 화했다. 그리고 청국에서 다음해와 그 다음해에 羅嘉傑본을 재판하고, 그 재판본이 1987년 북경의 中國書店(중국서점)에서 영인 재활자화되어 국외에도 수출되어졌다[36]. 따라서 <李朝韓籍(이조 한국서적)→日本寫本(일본사본)→ 日本版(일본판)→淸版(청판)→北京影印版(북경 영인판)→일본과 한국> 이라는 변천을 거쳐왔다.

  중국에 유출된 판목도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일본의 판목을 구입해서 인쇄한 의서는 23 종, 일본에서 입수한 漢韓(한한)의학서적을 재활자한 것이 10종, 일본의 문헌에서 복원 출판한 漢(한)의서는 4 종, 일본 의서는 46 종이나 출판되었다[37][38].

 일본은 에도 시대까지 약 1300년간, 거의 일방적으로 중국 의학과 한국 의학을 수용해 왔다. 그렇게 축적해 온 문헌과 연구의 일부분이, 아이러니하게 암흑의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떠나, 여짓껏 인접국으로부터 받아온 학문의 은혜에 겨우 조금이라도 보답하게 된 것이다.


4. 맺는 말

  일본과 한국의 전통의학은 중국의 영향하에 발전을 계속해 왔고, 각기 고유의 체계를 세워 왔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아니다. 세 나라의 상호 왕래는 특히 의학 문헌에서 잘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하나가 되어 변화하고 발전한 측면이 있다.

  혹 지금 문헌의 상호 왕래가 끼친 영향을 나라별로 논하라고 한다면, 다른 두 나라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일본의 전통 의학이라고 단언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의학이 일본에 미친 영향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충분히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일본이 전통 문헌을 전승하고 보존해서, 공헌한 사실과도 연계해서 고찰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경우의 사실이 한국 의학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몇몇 예를 들어 검증했다.

  역사의 큰 흐름은 민족과 문화, 그리고 국경도 해협도 쉽게 초월해 같이 움직이게 한다. 전통 의학이라 해도 그 예외일 수 없다. 앞으로 각국의 연구협력이 한층 더 진전된다면, 보다 많은 역사적 사실이 해명될 것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에 있어 새로운 상호발전의 역사를 창출하는 것이다.

(번역:筑波大學 金仁和)

文獻

[1] 三木榮『補訂 朝鮮醫學史及疾病史』序文、p.4、思文閣出版、1991

[2] 小曾戸洋「『醫心方』引用文獻名索引(一)」『日本醫史學雜誌』32卷1號、pp.89-118、1986

[3]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3-12、學術圖書刊行會、1973

[4]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12-164・ pp.259-319、學術圖書刊行會、1973

[5]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422、學術圖書刊行會、1973

[6] 中國中醫研究院圖書館『全國中醫圖書聯合目錄』p.703、中醫古籍出版社、1991

[7]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348-352、學術圖書刊行會、1973

[8] 三木榮『補訂 朝鮮醫學史及疾病史』序文 pp.13-15、思文閣出版、1991

[9] 友部和弘・小曾戸洋・眞柳誠「『靈樞』の古版-『鍼經』の刊行事實」『日本東洋醫學雜誌』40卷4號、p.293、1990

[10]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165-168、學術圖書刊行會、1973

[11]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170-258、學術圖書刊行會、1973

[12]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195-197・ pp.333-334、學術圖書刊行會、1973

[13] 蕭衍初・眞柳誠「中國新刊の日本關聯古醫籍」『漢方の臨牀』39卷11號、pp.1431-44、1992

[14] 眞柳誠「中國本草と日本の受容」『中國本草圖錄』9卷、pp.218-229、中央公論社、1993

[15]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377-381、學術圖書刊行會、1973

[16] 三木榮『補訂 朝鮮醫學史及疾病史』序文、pp.187-192、思文閣出版、1991

[17]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377-381、學術圖書刊行會、1973

[18] 眞柳誠「現存唯一無二の『醫方類聚』初版」『漢方の臨牀』39卷10號、 pp.1248-50、1992

[19] 小曾戸洋・關信之・栗原萬里子「和刻本漢籍醫書出版總合年表」『日本醫史學雜誌』36卷4號、pp.459-494、1990

[20] 小曾戸洋「『醫方大成論』解題」、小曾戸洋・眞柳誠編『和刻漢籍醫書集成』第7輯『醫書大全・醫方大成論』解說、pp.17-25、エンタプライズ、1989

[21] 眞柳誠「日本漢方を培った中國醫書20-本草文獻(その7)」『漢方と中醫學』19號、p.3、1993

[22]小曾戸洋「『玉機微義』解題」、小曾戸洋・眞柳誠編『和刻漢籍醫書集成』第5輯『玉機微義』解說、pp.2-10、エンタプライズ、1989

[23] 澁江全善・森立之等『經籍訪古志』卷7醫部、『近世漢方醫學書集成53』、p.396、名著出版、1981

[24]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p.337-338、學術圖書刊行會、1973

[25] 福井保『江戶幕府刊行物』、pp.80-83、雄松堂出版、1985

[26] 三木榮『增修版朝鮮醫書誌』、p.321、學術圖書刊行會、1973

[27] 吉田忠「朝鮮通信使との醫事問答」『日本文化研究所研究報告』第24集、 pp.27-69、東北大學、1988

[28] 多治比郁夫「近世活字版の醫書・本草書」『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紀要』第20號、pp.30-51、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1984

[29] 眞柳誠「喜多村直寬による『醫方類聚』の復刊」『漢方の臨牀』39卷12號、pp.1488-90、1992

[30] 岡西爲人『中國醫書本草考』、pp.28-133頁、南大阪印刷センター、1974

[31] 小曾戸洋・原中瑠璃子・小林茂三郎「漢方文獻の善本を所藏する圖書館とその利用法2  臺灣國立故宮博物院所藏楊守敬觀海堂本」『藥學圖書館』27卷1號、pp.25-32、1982

[32] 蘇精『近代藏書三十家』、pp.25-30、臺北・傳記文學出版社、1982

[33] 眞柳誠「淸國末期における日本漢方醫學書籍の傳入とその變遷について」『矢數道明先生喜壽記念文集』、pp.643-661、溫知會、1983

[34] 高毓秋・眞柳誠「丁福保與中日傳統醫學交流」『中華醫史雜誌』1992年3期 、pp.175-180、1992

[35] 眞柳誠・關信之・蕭衍初・森田傳一郎「中國に保存される日本傳統醫學文獻の孤本」『日本醫史學雜誌』38卷2號、pp.19-21、1992

[36] 蕭衍初・眞柳誠「中國新刊の日本關聯古醫籍」『漢方の臨牀』39卷11號、pp.1431-44、1992

[37] 眞柳誠「淸國末期における日本漢方醫學書籍の傳入とその變遷について」『矢數道明先生喜壽記念文集』、pp.643-661、溫知會、1983

[38] 眞柳誠「中國において出版された日本漢方關書籍の年代別目錄」『漢方の臨牀』30卷9號、pp.47-51、同10號、pp.32-41、1983